[보쿠아카] Cherish Me



보쿠아카 전력 60분 <권태기> 에 참여하였습니다!






***




두 사람은 함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보쿠토는 똑바르게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그 옆에 누워 있던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 등을 돌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고 가지 않았다. 그저 침묵만이 넓은 방 안을 메울 뿐이었다. 그러던 도중 아카아시가 몸을 돌려 보쿠토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영화 보러 갈래요?"

"아니."


보쿠토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말했다. 아카아시가 "예전부터 보고 싶었던 거 있었는데." 라고 이야기해도 보쿠토는 귀찮아, 하고 덧붙이는 것으로 대화를 단절했다.


"날씨도 좋은데 그럼 나가서 밥이나 먹어요."

"아 피곤해."


보쿠토는 더이상 아카아시와의 소통을 원하지 않는다는 듯 아카아시에게 등을 보였다. 아카아시는 꽤나 서운했는지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보쿠토 상 변했어요, 아카아시가 그렇게 말을 해도 보쿠토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카아시가 몸을 일으키자 보쿠토가 고개만 슥 돌려 "어디 가?" 하고 물었다. 


"집이요."

"뭐?"

"집에 간다고요."


왜. 보쿠토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아카아시에게 물었다. 아카아시 또한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같이 있어서 뭐해요. 어차피 아무것도 안하는데. 전 가볼테니까 편하게 쉬세요."


아카아시.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불렀다. 분명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는데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 아카아시가 괘씸했던 보쿠토는 침대에서 일어나 이미 현관문 근처까지 도착한 아카아시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붙잡았다. 아카아시는 날이 선 눈동자로 보쿠토와 붙잡힌 손목을 번갈아보다 이내 "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장난해?"

"뭐가요."
"집에 간다고?"


보쿠토가 머리 끝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아카아시는 차분한 목소리로 "놔주시죠." 하고 말했지만 보쿠토는 여전히 아카아시의 손목에 손자국이 날 정도로 강한 힘으로 그를 잡은 채 놓지 않고 있었다. 


"아프니까 놓으라고요."
"넌 왜 니 마음대로만 하냐?"
"보쿠토 상도 보쿠토 상 마음대로 하셨잖아요."
"뭐?"


보쿠토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얼마만에 보는 건지 알기나 하느냐는 보쿠토의 질문에 아카아시는 무덤덤히 "3주 만이죠." 하고 대답했다.


"넌 오랜만에 보는 내가 반갑지도 않냐?"
"보쿠토 상이 제가 반갑지 않은거겠죠."
"자꾸 말 그렇게 할래?"
"나 왜 만나요?"


보쿠토가 한숨을 내쉬었다. 보쿠토는 붙잡고 있던 아카아시의 손목을 뿌리치듯 놓고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짜증스럽게 헝클었다. 보쿠토가 서늘해진 눈빛으로 아카아시를 노려보았지만 아카아시는 전혀 물러서려는 기색이 없었다. 보쿠토가 자신의 물음에 한참이나 대답이 없자 아카아시는 "굳이 입 더럽히고 싶지 않으시면 제가 대신 말할까요?" 하고 물었다. 그 물음에도 보쿠토는 답이 없었다.


"나랑 자려고 만나는 거잖아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왜요? 너무 정곡을 찔러서 놀랐어요?"

"아냐 아카아시. 그런 거 아냐."


아카아시는 자신의 두 어깨를 손으로 감싸며 자신을 달래려는 보쿠토를 뿌리쳤다. 손 대지 말아요, 아카아시가 보쿠토에게 말했다. 보쿠토가 다시 한 번 아카아시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 만나서 섹스밖에 더 해요? 어디 나가자고 하면 이래서 싫다, 저래서 싫다. 맨날 귀찮다고만 하잖아요. 보쿠토 상 요즘 바쁘고 힘든 거 아니까 맞춰주려고 했어요. 근데 보쿠토 상은 나를 그냥 잠자리 상대로밖에 생각 안하시잖아요."

"아카아시."

"내 전화 안받잖아요. 시간이 없어서 못 받는게 아니라 나인 거 알면서 일부러 안받는거잖아요. 메세지도 안보잖아요. 나한테 관심 없죠? 이미 잡힌 물고기니까 신경 안써도 된다, 이거죠?"
"…."

"내 말이 틀려요? 하고 싶은 얘기 있으면 해봐요."
"…."

"봐. 아무 말도 못하잖아요. 내 말이 다 맞는 말이잖아요."

"케이지."
"하고 싶으신 말 있으면 하시라니까요. 들어 드릴테니까 해보세요."


아카아시가 팔짱을 끼고 보쿠토를 쳐다보았지만 보쿠토는 그저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카아시의 주장이 전부 옳은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옳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변명할 거리를 찾지 못한 보쿠토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지난 3주 동안, 아니 사실 훨씬 오래 전부터 나 생각 많이 해봤어요. 보쿠토 상은 몰랐겠지만 나 혼자 마음 고생 많았다구요."

"…."
"고생 많았으니까, 정리도 이제 다 끝냈어요. 그러니까 헤어져요 우리."
"뭐?"

"헤어져요. 그만 만나자구요."
"안돼. 안돼 아카아시.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그건 절대 안돼."


보쿠토가 횡설수설 아무 말이나 쏟아내며 안된다고 얘기했지만 아카아시는 확고했고, 마음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보쿠토가 부드러워진 손길로 아카아시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아카아시는 재빠르게 손을 빼내었다. 아카아시, 하고 부르는 보쿠토의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이 전해지는 걸 아카아시도 느꼈지만 그런 사소한 부분에서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아카아시는 무르지 않았다.


"이미 식었다면 최대한 빨리 정리하는 게 서로한테 좋지 않겠어요?"

"아냐. 아카아시 그런 거 아냐. 안돼 아카아시."

"그 동안 즐거웠고, 함께해서 행복했어요. 이제 우리 각자 갈 길 가요."
"안돼, 안돼 아카아시. 응? 제발. 내가 잘못했어. 안돼 아카아시."


보쿠토는 반쯤 울고 있었다. 하지만 보쿠토의 뉘우침은 이미 차가워진 아카아시의 눈빛을 되돌리기에 너무 늦어버렸고, 아카아시는 "잘 지내요. 고마웠어요." 하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이 집을 떠나버렸다. 닫히는 현관문을 보며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쫓아 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아카아시, 아카아시…, 몇 번을 불러도 그의 목소리는 아카아시에게 닿을 수 없었다.





"그래, 가라 가!"


보쿠토의 앞에는 빈 술병이 수도 없이 놓여 있었다. 코노하는 그의 맞은 편에 앉아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잔뜩 취한 보쿠토는 머리를 박고 엎드려 숟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탁, 탁 하는 규칙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아카아시…, 보쿠토는 작은 목소리로 아카아시를 불러댔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코노하는 "그만 해라. 니가 아무리 그래도 안돌아와." 하고 이야기했지만 보쿠토는 딱히 그의 목소리에 집중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카아시…. 아카아시가 보고 싶어."


보쿠토는 그렇게 말하다가도 이내 태도를 바꾸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사과는 역시 코노하의 몫이었다.


"나쁜 아카아시."


보쿠토의 눈에서 방울 진 눈물이 떨어졌다. 코노하는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뿐이었다.



*



아카아시 역시 충동적으로 이별을 고한 것은 아니었다. 충분히 참았고, 충분히 고민해본 결과였다. 내가 조금만 더 참고 맞춰주면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럴수록 아카아시는 더욱 고통스러워졌고, 보쿠토에 대한 불신과 미움도 커져만 갔다. 그래서 아카아시는 결국, 이별을 선택했다. 자신과 보쿠토의 행복을 고려해서 내린 최선의 결론이었다.


자신이 끝낸 관계인 만큼 아카아시는 예전과 다름없이 지내고 있었다. 어쩌면 예전보다 나아진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보쿠토가 없으니 아카아시는 온전히 자신의 생활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읽을 시간이 없어 사서 쌓아두기만 했던 책도 읽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들도 만나며 행복한 일상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 일상에 보쿠토가 아예 끼어있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었다. 밥을 먹다가도, 샤워를 하다가도 종종 보쿠토의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그저 보쿠토의 생각이 났을 뿐, 그가 보고 싶다거나 다시 만나고 싶다거나 하는 부류의 그리움과 미련같은 건 없었다. 연애를 하는 동안 아쉬움 없이 사랑을 주었고, 준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섭섭지 않을 만큼 돌려받았다. 그거면 되었다고 아카아시는 생각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에게 좋은 추억이었고, 추억은 예쁜 유리병에 넣어 간직할 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이었다.



*



저녁 시간이 다 되어 집에 돌아온 아카아시는 현관 앞에 쭈그려 앉아 있는 익숙한 실루엣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보쿠토 상? 아카아시가 조심스레 다가가며 그를 부르자 보쿠토는 고개를 들어 아카아시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뭐하세요."
"왜 내 전화 안받아."

"끝났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나는 끝내겠다고 말한 적 없어."
"왜 자꾸 질척하게 구십니까."
"미안해 아카아시. 내가 다 잘못했어. 나 너 없이 못살아. 돌아와주라. 내가 진짜 잘할게. 그 동안 못해준 만큼 더 잘해주고 아껴줄게. 미안해. 응?"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싸고는 말했다. 아카아시가 "못해준 건 아십니까?" 하고 묻자 보쿠토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아시는 조심스레 보쿠토의 손 사이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며 말했다.


"아시면 저 찾아오지 마세요. 보쿠토 상 없어서 저 지금 엄청 행복하고 편하고 좋거든요."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지나쳐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보쿠토는 현관문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아카아시의 이름을 불러댔다. 아카아시가 참다 못해 인터폰으로 "경찰 부르기 전에 그만하세요. 선수 생활은 계속 하셔야죠." 하고 말한 후에야 보쿠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돌아갔다. 집에 혼자 남은 아카아시는 무릎을 세워 끌어안고는 팔 위에 얼굴을 묻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잊은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던 듯 아카아시의 가슴 한 켠이 쿡쿡 쑤셔왔다. 참지 못한 눈물이 옷 소매를 적셨다.



*



헤어지자는 아카아시의 말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은 애초에 보쿠토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아카아시의 집을 찾아갔고, 아카아시를 다시 한 번 붙잡았고, 확인 사살을 당한 후에야 겨우 마음을 접었다. 마음을 접었다고 미련까지 지울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하루에도 수십번 씩 아카아시가 떠올랐으며 하루에도 수백번씩 아카아시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하지만 아카아시는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은 보쿠토는 더이상 아카아시를 찾아갈 수 없었다. 아카아시의 생각을 떨쳐내려 평소보다 몇 배 더 배구에 집중했다. 안그래도 배구밖에 모르고 살던 보쿠토였다. 같은 팀에서 활동하는 선수들과 코치, 감독이 그만하면 됐다고 보쿠토를 말려보아도 스파이크를 때리는 보쿠토의 손짓은 멈추지 않았다.



*



아카아시와 헤어진 지 꼭 9개월이 되는 날이었다. 그 날 아침부터 보쿠토는 한껏 긴장해 있었다. 보쿠토에게 그 날은 아주 중요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보쿠토. 잘 하고 와."

자신을 응원하던 선수들의 목소리에 보쿠토는 긴장을 감추고 웃어보였지만 입꼬리가 떨리는 것까진 숨길 수 없었다. 그 날은 국가대표 선발전이 있는 날이었다.


국가대표. 그것은 보쿠토의 오랜 염원이자 꿈이었다. 올림픽이란 무대 위 코트에서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는 게 보쿠토의 목표였다. 그리고 보쿠토는 지금 그 꿈이 실현되기 한 발자국 전에 서 있었다. 땀방울이 이마 위로 흐를 때까지 몸을 푼 보쿠토는 자신의 미래와 목표가 달린 코트 위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래, 평소처럼만 하자, 평소처럼만. 보쿠토가 주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항상 만지던 배구공이 오늘따라 어색하게 느껴졌다. 주심의 휘슬 소리가 울렸고, 보쿠토가 공을 높이 던져 띄웠다. 보쿠토가 나머지 한 발자국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



보쿠토는 낯선 침구 속에서 정신을 되찾았다. 보쿠토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보쿠토는 그들을 의식하지 못했다. 안돼, 하고 중얼거린 보쿠토가 급하게 일어나 침대를 벗어나려 했지만 침대 밖으로 채 한 걸음도 떨어지지 못한 곳에서 보쿠토는 주저앉아야만 했다. 보쿠토는 갑작스런 통증에 자신의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뭐야. 이거 뭐야.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시원스러운 해답은 도출되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은 눈물이 보쿠토의 뺨을 타고 흘렀다. 보쿠토의 세상이,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듯 했다.


부상이었다. 무릎이 보쿠토의 과도한 연습을 견뎌내지 못한 탓이었다. 선발전에서 첫 서브를 넣던 보쿠토는 도움닫기에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고, 점프를 하며 그 원인을 깨달았으며 제대로 된 착지도 하지 못한 채 바닥을 뒹굴어야만 했다. 무릎이 미친듯이 아파왔다. 무릎을 감싸쥐고 악을 쓰는 보쿠토를 본 스탭들이 달려와 보쿠토의 상태를 살폈고, 이내 보쿠토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으로 이송되는 도중 보쿠토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고, 정신을 잃기 직전까진 줄곧 아카아시의 생각을 했다. 헤어진 지가 언젠데, 걔가 뭐 그리 대단한 존재라고. 그렇게 자신을 세뇌해봐도 이 순간에 생각나는 사람은 단연코 아카아시였다. 아카아시가 보고 싶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보쿠토는 긴 잠에 빠져들었다.



보쿠토 상은 나쁜 사람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눈 앞에 있었다. 아카아시의 눈가가 잔뜩 붉어져 있었다. 날 혼자 뒀잖아요. 보쿠토 상. 왜 날 버렸어요.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아카아시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이상하리만치 선명한 그의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보쿠토의 고막을 울렸다. 아니야, 아니야 아카아시. 그런 게 아니야. 보쿠토가 고개를 내저으며 아카아시에게 손을 뻗었지만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있던 아카아시에게 보쿠토의 손길이 닿을 리 없었다. 아카아시,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이름을 부르며 아카아시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물이 흐르는 만큼 아카아시는 점차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아카아시, 아카아시,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불러보아도 아카아시는 멀어지기만 했다. 그렇게 아카아시의 모습이 보쿠토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하루에도 수 백번 씩 창 밖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죽어 버릴까. 지금의 보쿠토에게는 사는 이유가 없었다. 사랑했던 아카아시를 잃었고, 그토록 목을 메었던 배구마저 이제는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의도하지 않은 눈물이 흐를 때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생각했다. 보고 싶었다. 이젠 닿을 수 없는 사람이란 걸 알면서도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그리워했다. 하지만 아카아시를 다시 만나기엔 자신은 너무나도 초라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보쿠토에겐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병원에서 무기력한 한 달을 보냈다. 빠르게 퇴원을 하려면 산책이라도 하는 게 좋다는 의사의 조언은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회복도, 퇴원도 원하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지내다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 밖에는 없었다. 제 시간에 맞춰 제공되는 환자식도 제대로 챙겨먹지 않아 보쿠토는 예전보다 훨씬 수척해져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가족들과 주위 사람들에겐 가급적 찾아오지 말라고 당부를 해두었기에 보쿠토는 늘상 혼자 병실을 지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웬만해선 열리는 법이 없던 보쿠토의 병실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간호사인가 싶어 보쿠토는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곳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잘 지냈어요?"


보쿠토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하고 싶은 말이 가득했지만 이상하게도 입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 사람은 의자를 끌어와 보쿠토의 옆에 앉았다. 보쿠토는 그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뭐하는 거야."
"병문안 왔죠."
"나가."
"나 안 보고 싶었어요?"
"나가."


아카아시 케이지. 보쿠토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람이었다. 나가라는 말은 반 쯤 진심이었고, 반 쯤은 거짓이었다. 이런 몰골로 아카아시를 다시 만나는 것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그런 사소한 이유로 보고싶었던 아카아시를 쫓아내고 싶진 않았다. 


"난 보고 싶었는데."


쿵, 하고 보쿠토의 심장이 떨어지는 듯 했다. 자신을 밀어내던 아카아시가, 한 치의 여지도 없어보이던 아카아시가 이젠 제게 스스럼없이 보고싶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보쿠토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어떤 수식어도 보쿠토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표현하기엔 부족했다.


"왜 왔어."

"다쳤다면서요. 기사에서 봤어요."

"……."
"간병인같은 건 안 필요해요? 내가 해 줄 수 있는데."


아카아시가 보쿠토에게 웃어보였다. 보쿠토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다쳤어요."
"누군 다치고 싶었는 줄 아냐."

"왜 다쳤어요. 사람 마음 아프게."
"니 마음이 왜 아파."


아직 사랑하니까. 아카아시가 그렇게 말했다. 보쿠토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 향해있던 눈동자를 바닥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습관처럼 자신의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말했다.


"미안해요. 보쿠토 상 없이도 잘 살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요. 아직 많이 좋아해요. 그 말 해주고 싶어서 왔어요. 아, 물론 보쿠토 상은 아니라고 하면 어쩔 수 없죠. 그냥 짝사랑으로 남기는 수 밖에."
"……."
"근데 보쿠토 상도 나 보고 싶었잖아요. 그죠?"
"아닌데."

"맞는데. 얼굴에 다 써있어요."


그러고는 아카아시는 손을 내밀어 보쿠토의 뺨을 쓸었다. 까슬해진 피부가 손 끝을 통해 아카아시에게로 전해졌다. 미안해요, 아카아시가 다시 한 번 사과했다.


"넌 항상 니 멋대로야."

"알아요. 미안해요."
"……."

"그래서, 어떡할래요 이제?"

"……."
"대답 안 할 거예요?"
"나가줘. 나 피곤해."
"맨날 불리하면 말 돌리고."


보쿠토가 이불을 끌어당겨 덮고는 눈을 감으며 아카아시를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 그리고 아카아시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는 "알았어요, 가볼게요" 하는 아카아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대신 내일도 올거예요."
"뭐?"
"보쿠토 상 보고싶으니까. 내일도 오고 모레도 오고 매일 올거예요."
"오지마."
"말 안들을거니까 그렇게 얘기해도 소용 없어요."
"……."
"나 가요. 푹 쉬고 내일 봐요."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보쿠토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는 아카아시가 있던 자리를 돌아 보았다. 아카아시가 앉아 있던 의자 위에는 조그마한 상자가 들어 있었다. 보쿠토는 팔을 뻗어 그 상자를 집어 들었다. 아카아시와 사귈 때 자주 가던 가게의 케익이 들어 있었다. 항상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그 가게에 들러 함께 케익을 먹곤 했는데.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보쿠토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보쿠토는 상자 안에 들어있던 포크를 집어들어 케익을 입 안에 넣었다. 달콤한 풍미가 입 안 가득 퍼져왔다. 그리고는 자신을 생각하며 케익을 골랐을 아카아시를 떠올렸다. 쇼케이스 앞에 서서 심각한 표정을 하곤 한참을 고민했을 아카아시를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이미 끝난 거, 한 번 더 해보고 끝내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보쿠토는 그렇게 스스로 합리화하며 비어버린 케익 상자를 닫았다.



*



오지 말란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보쿠토는 발걸음 소리가 들릴 때마다 문 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해가 질 때 즈음이 되어서도 아카아시는 보이지 않았고, '그래. 그럴 줄 알았어.' 하고 체념한 순간 병실 문이 열리며 아카아시가 들어왔다.


"나 왔어요. 보고 싶었죠?"

"아니."


보쿠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쿵쿵 뛰는 그의 심장은 솔직했다. 아카아시는 들고 온 가방을 내려놓으며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나 자고 갈 거예요. 짐도 다 챙겨왔어요."

"뭐?"

"자고 간다구요."

"정말 너…."

"밤새 나 볼 생각하니까 막 좋죠? 나도 그래요."


아카아시가 예쁘게 웃어 보였다. 


"보쿠토 상이 나 싫다고 하면, 나 다시 좋아질 때까지 보쿠토 상 쫓아다닐 거예요. 그러니까 웬만하면 그냥 좋다고 해줘요."

"……."

"알겠죠?"


대답이 없는 보쿠토를 보며 아카아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고는 들고 온 가방에서 예쁘게 싸인 도시락 가방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보쿠토는 그것과 아카아시를 번갈아 보았다.


"보쿠토 상 주려고 도시락 싸왔어요. 병원 밥 맛 없잖아요."

"……."

"어때요? 나 좀 좋아진 것 같아요?"


아님 말고요. 아카아시가 중얼거리며 도시락을 열었다. 온통 보쿠토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아카아시는 수저를 꺼낸 후 불고기를 집어 보쿠토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보쿠토가 아카아시의 눈을 빤히 쳐다보자 아카아시는 "얼른 먹어요." 라고 말하고는 보쿠토의 입에 음식을 밀어넣었다. 그러고는 보쿠토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음식을 씹는 것을 턱을 괸 채 지켜보았다.


"맛있죠?"

"아니."

"또 거짓말 한다."


그렇게 말하며 밥 한 숟가락을 보쿠토에게 갖다주었다. 이번에 보쿠토는 별 저항 없이 아카아시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었다.


"갑자기 왜 이러냐. 왜 갑자기 잘해줘. 나 싫다고 차놓고는."


보쿠토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카아시는 말 없이 보쿠토에게 물병을 건네었고 보쿠토는 물과 함께 입 안에 있던 음식을 모두 삼키고는 가만히 앉아 아카아시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냥.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요."

"……."

"후회가 많이 됐어요. 그 때 그렇게 헤어지자고 하는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엄청 보고 싶었어요."

"……."

"더 참아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서 여기까지 찾아 온 거예요. 어차피 병원에선 못 도망가니까."


아카아시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넌 항상 니 멋대로 생각하고 니 멋대로 결정하더라."

"당연하죠. 내 인생이잖아요."

"그럼 나는. 내 인생은?"

"어차피 보쿠토 상은 내꺼니까 내 결정에 따라야해요."

"너무하네 진짜."


보쿠토는 아카아시 손에 들려있던 수저를 뺏어들어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아카아시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띄우고 밥을 먹는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넌 안 먹어? 하는 보쿠토의 말에 아카아시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식사를 마친 보쿠토에게 아카아시는 다른 도시락 통을 열어 잘 익은 딸기를 건넸다. 보쿠토는 빨간 딸기를 손으로 집어 먹으며 말했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나 너한테 잘해줄 수 있을거란 보장 못해."

"……."

"앞으로 배구를 못하게 될 지도 모르고. 니가 생각하던 그런 멋있는 사람이 아니야, 난 이제."

"상관 없어요."

"너 혼자 상처 받고 끝나버릴 지도 몰라."

"시작은 할 거예요?"

"어?"

"나랑 다시 시작 할거냐고요."

"뭐…, 너가 괜찮다고 하면."

"근데 왜 걱정부터 해요? 나 다 괜찮은데. 보쿠토 상 돈 못벌면 내가 벌어오면 되고. 보쿠토 상 나한테 무심한 것도 이젠 익숙해서 괜찮아요. 그니까 걱정하지 말고, 앞으로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생각만 해요. 알았죠?"

"……."

"대답 하세요."

"…응."


뭔가 속은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을 떨쳐낼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다는 요상한 느낌이 보쿠토를 강하게 때렸다.



*



그 후로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죽어도 안하겠다며 떼 쓰는 보쿠토를 설득해 재활훈련도 다시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보쿠토도 물론 힘들었겠지만, 자신보다 더 힘든 건 자신을 뒷바라지하는 아카아시라는 것을 보쿠토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케이지. 오늘만 빠지면 안돼?"

"안됩니다."

"2주 동안 열심히 했잖아. 응? 오늘만."

"안됩니다. 지금은 괜찮지만 나중에 늙어서 무릎 더 안좋아지면 제가 휠체어 끌어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는 거 싫어요.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세요."


아카아시! 하고 자신을 부르는 애처로운 보쿠토의 목소리를 무시한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일으컸다.



*



입국장을 나서는 보쿠토에게 카메라 플래쉬가 쏟아졌다. 짐을 끌고 나오는 보쿠토는 이미 수 많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채였다. 


"부상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번 올림픽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입니까?"


다른 선수들을 뒤로 하고 유독 자신에게만 집중되는 질문에 "죄송합니다. 인터뷰는 추후에 에이전시를 통해 정식으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일관한 보쿠토는 경호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또 다른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뭐야. 완전 스타잖아요."

"케이지, 지금 나 놀리는거지?"


아니거든요, 아카아시가 그렇게 대답하며 보쿠토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나도 보고 싶었어."


보쿠토가 자신에게 안겨있는 아카아시의 뒷통수를 쓰다듬었다. 아, 보쿠토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잠시 아카아시를 품에서 떼어내고는 가방을 뒤적이며 무언가를 찾아냈다. 


"고마워. 고맙고 사랑해 케이지."


보쿠토가 반짝이는 메달을 아카아시의 목에 걸어주었다. 아카아시는 신기한 듯 메달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진짜 꿈을 이루었네요."

"응? 뭐가?"

"올림픽 나가서 메달 따오는 거. 그게 꿈이라고 맨날 그랬었잖아요."

"아, 그건 두번째 꿈이지."


두번째요? 그럼 첫번째는요, 하고 묻는 아카아시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보쿠토는 아카아시와 손을 맞잡았다.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아카아시에게 보쿠토는 그렇게 말한다.


"너랑 평생 같이 사는 거. 나랑 결혼해줘, 케이지."


아카아시가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투명한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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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누가 나 대신 마지막 장면 좀 써줘라 진짜 알바비 줄테니까.... 누가 완결성 있게 마무리 좀 지어주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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