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켄 / 벚꽃이 필 무렵





에피톤 프로젝트 - 봄날, 벚꽃, 그리고 너

라는 곡인데 함께 들어주시면 더욱 느낌이 삽니다!
















스무살,

확실히 멀리까지 찾아온 보람이 있었다. 켄마가 성인이 된 후 처음 맞이하는 봄에는 꼭 의미있는 곳으로 벚꽃구경을 가겠다고 선언한 쿠로오는 보란듯이 멋진 장소를 찾아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이 작은 마을은 아직 입소문을 타지 않아 벚꽃 구경을 온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많지 않았다기보단 거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도 몰랐다. 켄마는 두 손을 꼬옥 붙잡은 채 함께 산책길을 걸었다. 분홍빛으로 물든 길이 아름다웠다. 아마 서로가 곁에 있어 더욱 아름다워 보였을 것이다. 구불구불한 산책로를 끊임없이 따라 걸었다. 이토록 아름다웠지만 이 길을 걷는 이는 온전히 쿠로오와 켄마 두 사람 뿐이었다. 아무도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았다. 쿠로오는 켄마에게 다가갔고,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스킨십을 딱히 좋아하지 않던 켄마도 그의 입술을 거부하지 않았다. 지독히도 달콤한 봄이었다.



스물한살,

그 작은 마을에 어느새 민박집이 생겼다. 딱 한 군데 뿐이었지만 쿠로오는 묵을 곳이 생겼다는 것에 기뻐했다. 사실 민박집이라기보단, 아들을 장가 보낸 주인집 할머니가 용돈벌이로 아들이 쓰던 방을 내어주는 것이었다. 방은 좁았고 허름했지만 쿠로오와 켄마는 충분히 그 방에 만족했다. 둘은 민박집에 대충 짐을 풀고 할머니가 차려주신 점심을 든든히 먹은 후 작년에도 걸었던 산책길을 또 다시 걸었다. 작년과 다를 바 없는 길이었지만 어딘가 달라진 것 같기도 했다. 둘은 가져온 돗자리를 산책로 한 구석에 깔고 한참을 그곳에 앉아 여유를 즐겼다. 행복했다. 이 시간이 영원하길 그들은 바랬다. 어느덧 노을이 짙게 깔렸고, 그들은 돗자리를 정리하고 다시 민박으로 향했다. 둘은 푹신한 이불 위에서 한참을 장난치다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에 혀를 섞었고, 몸도 섞었다. 쿠로오와 켄마의 첫경험이었다.



스물두살,

귀찮아서 그냥 집에 있겠다는 켄마를 겨우겨우 집에서 끌고 나왔다. 봄인데, 날씨 좋잖아. 라며 자신을 차에 태우는 쿠로오를 켄마는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주머니에 게임기를 챙겨 나온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켄마는 조수석에 앉아 말 한마디 없이 게임만 했다. 쿠로오가 핀잔을 주어도 한 귀로 흘려버렸다. 둘은 그 마을에 도착했고, 작년에 갔던 민박을 찾아갔지만 이미 누군가가 묵고 있어 발걸음을 돌렸다. 아쉬운대로 당일치기 여행이라도 할까 싶어 켄마를 끌고 그 산책로를 걸었다. 작년, 제작년과는 다르게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다. SNS에서 벚꽃 명소로 이름을 날린 후에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했다. 예전과 달리 그 길은 시끄러웠고 사람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로 너저분했다. 더 이상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봐봐, 내가 안온다고 했잖아. 툴툴대는 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은 벚꽃을 제대로 구경하지도 못하고 집으로 향했다. 




스물세살,

주말에 켄마와 벚꽃 놀이를 가기로 했던 쿠로오는 금요일 저녁부터 시원하게 내리는 비를 원망했다. 혹시나 싶어 내다본 집 앞 벚꽃나무는 이미 꽃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었다. 못 가겠네, 벚꽃놀이. 쿠로오의 기분은 가라앉은 날씨와 같았다.



스물네살,

쿠로오와 켄마가 헤어졌다.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렸다. 생각했던 것 보단 아무렇지 않았다. 둘이 함께하지 않아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왔고 벚꽃도 피어났다. 쿠로오는 혼자 그 마을로 향했다. 딱히 벚꽃이 보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왠지 벚꽃이 필 무렵에는 찾아가야할 것만 같았다. 5년 간 한 해도 빠짐없이 벚꽃이 필 때 즈음이면 이 마을을 찾았던 쿠로오를 마을 주민들이 알아보았다. 쿠로오도 멋쩍게 인사를 건넸다. 

그 다음 날은 켄마도 그 마을에 찾아왔다. 켄마도 쿠로오와 마찬가지였다. 딱히 이유가 있지 않아도 발걸음이 알아서 이 곳으로 향했다. 산책로를 유유히 걷고 있을 때, 낯익은 아주머니가 켄마에게 말을 걸었다. 어, 오늘은 총각이 왔네. 같이 오던 총각은 어제 혼자 왔다 갔는데. 싸웠어? 그 말을 들은 켄마의 마음이 어딘가 싱숭생숭했다. 이젠 정말 쿠로가 없구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게 보이는구나. 켄마의 마음 한 구석이 시큰해져왔다. 이별이었다.




스물다섯살,

벚꽃이 전부 피고 질 때까지, 쿠로오와 켄마 그 둘 중 한 명도 마을을 찾지 않았다. 그들은 그 마을을 잊은 걸까. 쿠로오와 켄마는 변해버렸지만, 벚꽃의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스물여섯살,

새로 사귄 애인과 함께 켄마는 그 마을을 찾았다. 새 애인과 걷는 길 구석구석 쿠로오가 느껴졌지만 굳이 그걸 티 내진 않았다. 벚꽃 진짜 예쁘네. 켄마는 마치 이 곳에 처음 온 것과 같이 행동했다. 한창 벚꽃의 아름다움에 취해있을 때, 저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켄마의 눈에 들어왔다. 별게 다 보이네, 라며 켄마는 픽 웃었다. 그 실루엣은 점차 가까워졌고, 불행히도 그것은 그저 신기루가 아닌 실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둘은 잠시동안 눈을 마주쳤다. 말하지 못한 많은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는 눈빛이었다. 쿠로오의 옆에도 이제는 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서있었다. 자신보다 쿠로오와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 흔한 인사도 없이 둘은 지나쳤고, 두 사람을 스치는 공기에는 그 어떤 아쉬움도 남아있지 않았다. 정말 이별이었다.

표삼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