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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아카] Paris in the Rain 01

Let's do it, let's fall in love.

[보쿠아카] Paris in the Rain 01



삼 년 간, 한번이라도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있었던가. 비가 오는 창문 너머 방울진 풍경을 내다보며 아카아시는 그런 생각을 했다. 축축하게 식은 이 공간이 아직까지 낯설다고 느끼며 아카아시는 침대로 몸을 내던졌다. 눈 위에 팔을 올렸다. 이제 눈물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생각이 머릿속을 비집고 나오는 것만큼은 스스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무기력함의 절정이었다. 익숙하고도 익숙한 방 안이었지만 아카아시는 다시금 꼼꼼히 구석구석을 훑었다. 그의 그림자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아카아시의 시야에 들어온 건 다름아닌 먼지가 켜켜이 쌓인 빈 캐리어였다. 그가 떠남과 동시에 한 번도 열어본 적 없었던 그것. 아카아시는 문득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들끓어오름을 느꼈다. 지체 없이 몸을 일으킨 아카아시는 캐리어를 열곤 눈에 보이는 옷가지를 그 안에 던져 넣기 시작했다. 정렬되지 않은 물건들이 담긴 채 그대로 지퍼를 닫아 잠근 아카아시는 서랍을 열어 오래도록 쓸 일이 없었던 여권을 꺼냈다. 떠나야지, 떠나야겠다. 강한 충동이었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 아카아시는 파리에 와 있었다.


*


많고 많은 도시 중 굳이 파리를 선택한 이유는 대단할 것이 없었다. 파리 행 항공편이 다른 도시로 행하는 것보다 훨씬 많았고, 얼마 전 무심코 틀어둔 티비 채널에서 파리를 주제로 한 영화가 흘러나왔기 떄문이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아카아시는 그다지 집중한 적이 없었으나 뇌리에 박혀 떠나가지 않는 여주인공의 한 대사가 있었다. 

"낮의 파리와 밤의 파리 중 고르라는 것은 영원한 숙제죠."

잠깐이나마 그 때의 아카아시는,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사랑의 도시, 파리에.


숙소조차 예약하지 못 하고 떠나온 아카아시는 유명한 체인 호텔로 향했다. 파리에 처음 온 탓에 아는곳이 없기도 했고, 잠만큼은 편하게 자고 싶었기 때문이다. 챙겨온 짐을 대충 방 안에 놔둔 후 아카아시는 이른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호텔을 나서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뒤에 모자를 푹눌러쓰고 서 있던 사람의 시선이 이따금씩 느껴졌다. 하지만 별 대수롭지 않게 넘긴 아카아시는 체크인을 할 때 추천 받은 레스토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식사는 만족스러웠다. 꽤나 큰 돈을 지불한 보람이 있다고 아카아시는 생각했다. 이 근처를 조금 둘러보고 싶어진 아카아시는 느리게 걸으며 주위를 두 눈에 담았다. 확실히 예뻤다. 누구에겐 흔한 길거리일 수도, 꿈의 공간일 수도 있는 이곳. 잠깐이지만 아카아시는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우울함을 잊을 수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걸었을까, 아카아시는 어느새 그의 호텔 앞에 도착해있었다. 아쉬움을 숨기며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그 안에 몸을 싣고 문이 거의 닫혀갈 때 쯤, 누군가에 의해 다시 문이 열렸다. 살짝 고개 숙여 자신의 실례에 대해 사과한 사람은 아까 제 뒤에 있던 사람과 비슷한 것도 같았다. 그의 얼굴을 조금 더 자세히 보려 했으나 얼굴을 가린 모자와 마스크 때문에 제대로 보긴 어려웠다. 아카아시가 알 수 있던 거라곤 그 사람이 키가 꽤 크다는 것 뿐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아카아시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가득 받아 지친 몸을 녹였다. 그리고 아까 그 사람도 점점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음 날, 느즈막히 일어난 아카아시는 대충 관광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파리에 온 만큼, 유명한 곳은적당히 둘러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가고 싶은 곳 몇 군데를 정한 후, 아카아시는 호텔 근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아침도 거른 탓에 무언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날이 흐렸지만 테라스에 자리를 잡은 아카아시는 간단한 파스타를 주문했다. 사실 메뉴판에 아는 음식이 파스타 말곤 별로 없던 탓이기도 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아카아시는 지도 앱을 열어 첫번째 행선지인 에펠탑으로 가는 길을 검색했다. 그렇게 한참을 화면을 쳐다보던 아카아시는 옆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온 건가 싶어 휴대폰을 내려두고 고개를 돌린 아카아시는 뜻 밖의 인물을 마주했다. 어제 엘리베이터에서 두 번이나 스쳐간 그 사람이었다. 모자와 마스크를 벗은, 그 사람.

그 사람은 자연스레 아카아시의 맞은편에 앉아 자신의 음식도 함께 주문했다. 당황감에 할 말을 잊은 아카아시 대신 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맞죠? 어제 왜, 엘리베이터에서."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입꼬리에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놀랐어요?" 이어지는 물음에 아카아시는 한 번 더 끄덕였다.

"놀랐다면 미안해요. 호텔에서 일본인 마주친 게 오랜만이라."

중국인들은 많은데 일본인은 잘 없더라구. 그렇게 덧붙이며 그는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는 서버를 불러 유창한 불어로 익숙하게 와인을 주문했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여행?"

"뭐, 그런 셈이죠."

명확하지 않은 아카아시의 대답에 그는 팔짱을 끼곤 아카아시 쪽으로 좀 더 몸을 숙였다.

"학생이에요?"

아카아시는 대화를 이어가는 대신 조금 불편한 기색을 표했다. 다행히도 그는 눈치가 빨랐다. 와인 두잔을 내온 서버에게 간단하게 감사의 표시를 한 그는 목에 감고 있던 머플러를 풀어내며 말했다.

"나는 보쿠토 코타로예요. 파리엔 잠깐 도망왔어요."

그는 실없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이는 스물 여섯, 직업은 없고요. 원래는 도쿄에 삽니다. 알다시피, 같은 호텔 17층에 묵고 있어요."

"......"

"혹시 더 궁금한 거 있어요? 난 다 말해줄 수 있는데."

잠깐 고민한 끝에 괜찮다고 대답한 아카아시에게 만족한 듯 웃어주며 보쿠토는 잔을 들어 건배를 청했다.


*


이곳에 대해 하나도 모른다는 아카아시의 말에, 전에도 파리에 몇 번 와본 적이 있다던 보쿠토가 자신있게 관광을 시켜주겠다고 나섰다. 그다지 내키진 않았으나 길을 잃고 헤매는 것보단 그를 따라다니는 게 낫겠다는 판단에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첫번째로 향한 곳은 아카아시가 염두에 두고 있던 에펠탑이었다. 사진 속 여유로운 모습과 달리 그곳은 매우 붐볐다. 하지만 사람이 많은 것도 이곳만의 매력이었다. 온 김에 전망대에 올라가보지 않겠냐는 보쿠토의 제안에 아카아시는 고개를 내저었다. 긴 줄 끝에 서 있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에펠탑 앞에서 사진이나 몇 장 찍어주겠다는 그의 말은 거절하지 않았다.

"오늘은 날이 흐려서 그런지 사진이 안 예쁘네."

결과물은 그리 좋지 않았다. 확실히 보쿠토의 사진 솜씨보단 날씨가 좋지 않은 탓이었다. 구름이 잔뜩껴 칙칙해진 은빛 하늘은 우울함까지 감돌았다.

"파리에 언제까지 있어? 다음에 날씨 좋을 때 다시 올까?"

아카아시는 고민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충분히 예쁜데요."

아카아시의 말에 보쿠토의 기분이 조금은 좋아진 듯 했다.



*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두 사람은 함께 파리를 여행했다. 꽤 많은 대화를 나눈 탓에 서로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었다. 보쿠토는 왜 파리까지 도망을 왔냐는 질문 빼곤 자신에 대해 궁금해하는 아카아시에게 모두 대답을 들려줬다. 스스로를 잘 드러내지 않는 아카아시도 그에게만큼은 많은 걸 얘기할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보쿠토와 함께 있을 때의 아카아시는, 그 동안 어떤 짓을 해도 제 마음 속 한 구석을 단단히 지키고 있던 옛 애인을 잊을 수 있었다.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꽃집에서 보쿠토는 제일 눈에 띄는 꽃 한 다발을 샀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그걸 아카아시에게 건넸다. 졸업식을 빼곤 꽃을 선물 받은 게 처음이었지만 아카아시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저 에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한 손에 예쁜 꽃을 가득 들고 그렇게 한참을 길을 따라 걷다가, 건물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에펠탑을 바라보며 보쿠토가 문득 물었다.

"방에서 에펠탑 보여?"

"아뇨. 에펠탑 뷰로는 남은 방이 없대서요."

보쿠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깐 생각하곤 물었다.

"오늘 밤에 내 방으로 올래?"

"왜요?"

"내 방, 에펠탑 엄청 잘 보이거든."

아카아시는 살짝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꽃 향기를 맡았다. 두 사람의 얼굴엔 여유와 긴장감이 적절히 비췄다.

"그러죠, 뭐.'

그리고 아카아시의 대답은 흔쾌했다.


해가 지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파리는 비가 와도 낭만을 잃지 않았다. 보쿠토가 얘기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밖엔 빗줄기가 더 거세져 있었다. 두 사람은 근처 가판대에서 7유로를 주고 작은 우산 하나를 샀다. 꼭 붙어 우산을 나눠쓰고 미끌하게 젖은 돌길을 걷다 처음 만났던 그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이따 내 방으로 와. 1709호."

"네. 이따 뵐게요."

9층에서 먼저 내린 아카아시는 살짝 긴장한 듯한 그의 표정과 목소리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아주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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