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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아카] 끓는점 01

[보쿠아카] 끓는점 01


가볍게 즐겨 주세요!


본 글은 3-5 회 가량 샘플로 공개된 후 회지로 발행될 예정입니다. ^_^







선배와 매일같이 붙어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경영학과에 입학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던 내가 자기소개서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도 않을 부활동에 그렇게 열정을 쏟았던 것도, 대화하는 걸 즐기지도 않으면서 매일같이 휴대폰 메신저 앱만 붙잡고 있던 것도 나는 전부 그 선배가 원인일 거라고 확신한다. 내가 배구부에 입부 신청서를 내던 그 순간부터, 내가 졸업하던 그 날까지. 어쩌면 그 이후에도 줄곧 그 선배는 내 기억 속에 살았다. 영원히 줄어들지 않을 거리를 모호하게 두며, 선배는 늘 그렇게 내 곁에 있었다.




*




 보쿠토는 초조하게 계속 칠판 위에 걸린 시계만 쳐다본다. 분필을 4개나 부숴가며 열강을 펼치던 교수가 이미 수업이 마칠 시간을 30분이나 초과했는데도 아직 교단 위에 서 있었던 탓이다. 오늘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아카아시와 만나는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괜찮은 옷을 몇 벌이나 꺼내보고,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인사말을 고르느라 진을 뺐다. 그러나 보쿠토가 쭉 상상했던 시나리오 속에는 자신이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할 거란 장면은 없었다. 교수와 시계, 그리고 휴대폰 알림 창을 번갈아 보던 보쿠토는 약속 장소까지의 이동 시간을 줄일 만한 방법을 모색해보지만, 지금 당장 택시를 잡아서 탄다고 해도 퇴근시간이 겹친 도로는 보쿠토의 조급함에 별 다른 도움을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런 보쿠토의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한 시간은 야박하게 흘러가기만 한다.



 만원 버스에 몸을 실은 보쿠토는 손잡이를 붙잡지 않은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어 아카아시와의 채팅 창을 쭉 올려본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자신의 말 끝엔 근처 카페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천천히 오라는 아카아시의 대답이 있었다. 아카아시는 화를 낼 줄 몰랐다. 어쩌면 그보다 감정이 많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지도 몰랐다. 그는 언제나 담담하게 괜찮다는 말만을 했다. 실수로 보쿠토가 그에게 물을 끼얹었을 때도, 지난번에 빌렸던 만 엔을 갚는 걸 잊어버렸을 때도, 보쿠토의 졸업식 날에도 아카아시는 늘 괜찮다고 말했다. 표정이나 어조의 변화도 없었다. 보쿠토는 가끔 아카아시의 그런 성격에 서운함을 느끼기도 했다. 문득, 그래도 그 때 그 얘길 해볼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스치지만 보쿠토는 이내 고개를 내젓는다. 어차피 결과는 뻔했다. 어떤 타이밍에서 어떤 방법으로 고백을 했어도, 아카아시는 그런 보쿠토의 마음을 거절했을 거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카아시는, 보쿠토를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급한 마음에 보쿠토는 역에서 약속 장소까지 뛰고 말았다. 천천히 오라는 아카아시의 말을 잊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보쿠토는 미안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카아시가 보내준 주소 속 카페는 역에서 별로 멀지 않아 다행이라고 보쿠토는 생각했다.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머리를 다시금 매만진 후 보쿠토는 카페 안으로 발을 들였다.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지만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찾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눈에 띄는 게 싫다던 아카아시는 그 때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가장 어둡고 구석진 자리에 앉아 벽에 몸을 기대고 잠에 빠져든 아카아시를 깨우는 대신, 보쿠토는 맞은편에서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는 걸 택했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도, 긴 속눈썹과 높은 콧대, 그리고 앵두를 머금은 것 마냥 붉게 물든 얇은 입술도 보쿠토가 좋아하던 그 때의 아카아시와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보쿠토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간다.

“오랜만이네.”

 보쿠토는 들리지 않을 인사를 아카아시에게 건넸다.




*




 아카아시가 눈을 뜬 건 그 이후로 30분 여가 지난 후였다. 선배는 아직인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기지개를 켜는데 무언가가 등을 스치고 떨어졌다.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낮추니 못 보던 검은색 옷 뭉치가 보인다. 아카아시는 몸을 굽혀 바닥에 떨어진 그것을 줍는다. 대충 봐도 보쿠토가 입고 온 가디건이 분명했다. 고개를 돌려 보쿠토를 찾아보지만 어디서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제 손에 들려 있는 검은 가디건과 맞은 편 의자에 놓여있는 백팩만이 그가 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졸음이 묻은 얼굴로 기분 좋게 웃으며 그의 옷에 얼굴을 묻곤 숨을 들이쉰다.

“선배 냄새.”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카아시는 다시 어깨에 그 옷을 두르며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든다. 보쿠토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려는 순간, 옅은 종소리와 함께 보쿠토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카아시가 가장 좋아하던 웃음과 함께 보쿠토가 “깼어?” 라고 물었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제 때문에 최근에 잠을 잘 못 잤더니 잠들어버렸네요.”

 아카아시가 부끄러운 듯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며 실소를 터뜨렸다.

“왜 안 깨우셨어요.”
“늦어서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동그래진 아카아시의 눈이 보쿠토의 물음이 의외라는 걸 보여주는 듯 했다. 이윽고, 아카아시는 눈을 살짝 접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와줘서 고마워요, 선배.”

 봄을 닮은 아름다운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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